의왕의 문화유적과 인물
우리 지역에 옛 문화유산과 훌륭한 인물 이야기 다양한 문화와 깨끗한 자연을 향유할 수 있는 문화도시 의왕
의왕시 월암동에 있는 안자묘는 안향의 신위를 모신 사당으로 황해도 연백군 화성면 송천리에 있던 것을 1947년 한국전쟁으로 서울시 마포구 창전동으로 옮겼다가 1977년 현재의 위치로 옮겨왔다.
묘당의 전체 면적은 약 1,500여평으로 입구에「안자묘」란 비석이 있고 솟을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맛배지붕에 내부 전체를 붉은 단청을 한 3칸의 한옥이 웅장하게 버티고 있다. 묘당의 가운데 처마 밑에는「안자묘」란 현판이 걸려 있는데, 이 현판은 공자의 후손인 공덕성이 쓴 것이라고 전한다.
안향은 고려시대의 명신·학자로 호는 회헌, 시호는 문성공으로 흥주사람이다. 충렬왕 15년(1289)에 정동행성의 좌우사랑중과 고려유학제거가 되었으며, 이 해에 왕을 따라 원의 연경에 갔다가 처음으로 <주자전서>를 보고 손수 책을 베껴 썼으며 공자와 주자의 화상을 그려 가지고 돌아와서 주자학을 연구하였다.
유학의 진흥을 위하여 장학기금으로 6품 이상은 각각 은 1돈씩, 7품 이하는 포를 내게하여 이를 양현고에 귀속시키고 그 이식으로서 학교를 운영하는 한편 박사 김문정 등을 중국에 보내서 공자와 그 제자들의 조상을 기리고 제기·악기·경서 등을 구해오게 하는 등 고려말기 유학 진흥에 큰 공을 남겼다.
우리나라에 맨 처음 주자학을 받아들인 최초의 주자학도로 보고 있으며, 죽은지 12년째 되는 충숙왕 5년(1318)에는 그의 공적을 기념하기 위하여 왕이 그의 초상을 그리게 하였다. 안자묘에서는 종친회 주관으로 음력 9월 12일에 제사를 지내는데 전국에서 약 500 ∼ 600명이 참석한다고 한다. 시에서는 비지정문화재로 관리하고 있다.
의왕시 고천동 272-2번지 시청별관 내에 자리잡고 있는 사근행궁터는 조선조 효도대왕으로 일컬어질 만큼 효성이 지극했던 22대 정조가 부왕(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능행을 위해 일시 쉬어가던 곳이다.
1760년 사도세자가 온양 온천에 행차할 때 이곳에서 쉬어간 일이 있었는데 효심이 지극한 정조는 양주 배봉산에서 부왕인 사도세자의 묘를 수원의 화성으로 이장하던 1789년 10월 6일 상여가 이곳에 이르자 마중한 이곳 노인들에게 경기감사로 하여금 쌀을 나누어 주게 하고 행궁을 지으니 이름을 사근행궁(肆覲行宮)이라 하였다.
정조는 그 후에도 수차에 걸쳐 이곳에 들렀는데 특히 1795년 2월 10일과 15일에는 어머니 혜경궁홍씨와 함께 들러 수라(식사)를 들기도 했다. 효행을 몸소 실천한 정조의 거룩한 효행을 후세에 기리기 위해 백운회에서 기념비를 세웠으며 시에서는 이 날을 기념하기 위해서 10월 6일을 시민의 날로 제정하였다.
검재 김유선생영정은 경기도 지정 유형문화재 제117호로 지정되어 있다. 김유는 조선 숙종 때의 문관으로 자는 사직, 호는 검재, 아호는 문경이고 본관은 청풍이다.
학문에 조예가 깊어 그의 스승이던 남계 박세채가 후계자로 지목 하였으며 우암 송시열도 매우 중히 여겼을 정도다. 1674년 남계와 우암이 처벌당하자 과거를 포기하고 일시 이천에 은거하였다가 숙종 때에 들어와서 사마시를 거쳐 문과에 급제한 후 <동국여지승람>을 증보하였고 삼사·부제학·이조참판을 거쳐 대제학에 이르렀다. 문장에 능하였고 학문의 연구가 깊어 많은 저서를 남겼던 인물이다.
이 초상은 당당한 풍모에 서린 듯한 백발이 위풍을 더 해 주는 것으로서 우측 상단에 「검재 김유선생화상」이라 묵서되어 있고, 그 아래 작은 글씨로 64세 시사라는 기록이 있다. 영정의 모습은 의자에 앉아 있는 전신상으로 손을 맞잡은 좌향취세이다. 검재 김유선생영정은 청풍김씨 판서공파종회에 보관하고 있다가 2002. 1. 30 경기도 박물관에 위탁 관리하고 있다.
의왕시 내손동 산154-1에 있는 세종대왕의 넷째왕자인 임영대군 묘 및 사당은 능안 마을 뒤쪽 모락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다.
묘역은 3단으로 상단에는 봉분과 비석이 있는데 봉분은 둘레가 1,650cm, 높이가 210cm로 대형이다. 봉분주변의 호석은 1981년에 새로 축조한 것으로 동서남북의 모서리에 대나무, 꽃, 새 등의 무늬를 새겨놓았다. 봉분의 동쪽에는 높이 200cm, 너비 50cm의 비석이 있는데 앞면에「조선국왕자임영대군정간공지묘 (朝鮮國王子臨瀛大君貞簡公之墓)」 뒷면에는「개국오백삼십삼년알봉곤돈병월일중건신좌(開國五百三十三年閼逢困敦病月日重建辛坐)」가 새겨져 있다.
중단에는 상석, 망주석 2개, 장명 등이 있다. 원래의 상석은 없어지고 1981년 새로 만든 이 상석은 140×90×45cm의 크기이고, 비석은 너비 43cm, 높이 36cm로 중간에 문고리 모양이 양각되어 있다. 숙종때 세웠다고 하는 장명등은 사방으로 4개의 구멍이 뚫려 있다. 하단에는 동서 양쪽에 높이 250cm의 문신석인이 있는데, 얼굴이 새겨진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두손을 모아쥐고 있는 홀도 선명하다. 임영대군의 신주를 모신 사당은 묘역에서 동쪽으로 약 200m 떨어진 곳이다. 원래 사당의 위치는 마을에 있었으나, 지금부터 약 180년 전에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고 한다. 제향은 음력으로 정월 21일 낮 12시에 행하며 전국에서 많은 후손들이 참여한다고 한다. 사당은 크지는 않지만 건물의 짜임새나 전체적인 균형이 잘 맞추어져 있다. 경기도에서는 2000년4월17일 문화재 자료 98호로 지정하였다.
의왕시 학의동 천주교 공원묘지 위쪽에 있는 정인섭 노래비는 1983년 11월 20일 색동회에서 세운 것으로 묘비 앞면에는 「눈솔 동래 정공요셉 인섭박사의 묘」라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그의 유명한 작품인 「산들바람」이 새겨져 있다.
시인이며 학자인 눈솔 정인섭은 1932년 방정환과 함께 색동회를 조직했으며 1956년 펜클럽 한국본부위원장을 지냈고 1958년 중앙대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1974년 색동회 회장등을 지냈으며 국민훈장모란장과 펜클럽 번역상을 받았다.저서로는 한국문단논고, 세계문학산고, 종합변증법세계문학론, 국어음성학연구 등이 있으며 시집으로는 <산넘고 물건너>, <별같이 구름같이>가 있고 수필집에는 <버릴수 없는 꽃다발>, <생각은 파도처럼>, <일요방담>등 다수가 있다.
일석 이희승 박사는 1896년 출생하였으며, 의왕시 포일동 87-13 양지편마을에 생가가 있다. 이희승 박사의 본관은 전의이다.
1932년 조선어학회 간사였고, 1957년 서울대학교 문리과 대학장으로 학술원상을 수상했다. 1960년에는 서울시 교육위원회 공로상을 수상했으며 , 1962년에는 건국공로훈장을 받았다. 1971년에는 단국대학교 부설 동양학연구소장을 역임하였다. 1988년에는 한국어문교육연구소장, 학술원 원로회장, 사단법인 현정회 이사장, 재단법인 인촌기념회 이사장을 역임하였다.
주요 학술 저서로는 역대 조선문학정화, 국어학논고, 국문학연구초, 국어학개설 등이 있고, 시집으로는 박꽃, 심장의 파편 등이 있으며, 수필집으로는 벙어리 냉가슴, 딸깍발이 등 다수가 있다. 또한 「다시 태어나도 이 길을」이란 요약 자서전이 있다. 1948년에 역대국문학전집, 1981년에 국어대사전을 편저했다. 이희승 박사는 1989년 작고하였다.
청계사의 동종은 보물 제11-7호로 조선 숙종 27년(1701)에 제작되었으며 청계사의 극락보전과 삼성각 바로 앞에 있는 종각안에 있다.
종의 꼭대기는 수평으로 펑퍼짐하지 않고 약간 둥그스름하게 불러 있으며 그 한가운데에 서로 반대쪽을 향해 있으면서 몸이 엉켜있는 쌍용의 용누가 돌출해 있어 여기에 쇠리를 꿰어 종을 매달았다. 어깨부분에 돌려진 띠는 그 안에 연속으로 줄무늬를 새겨 장식하였고 맨 아래쪽 종구의 둘레를 장식한 띠에는 보상화문이 연속으로 새겨져 있다.
종의 어깨부위 둘레에는 정방향에 가까운 4개의 독립된 유곽을 마련하고 그 안에 각기 9 개씩의 유두(乳頭)를 새겼는데 유곽의 띠와 유두의 꽃무늬 자방(子房)만이 다소 도드라진 꼭지로 표현되었다.
유곽과 유곽 사이에는 각기 한분씩의 보살입상을 새겨 넣었고 종의 중허리에는 종을 한바퀴 도는 두가닥의 평행선이 도드라져 있다. 평행선 바로 아래에는 「명문은 강희 40년(1701) 신미 4월에 주성(鑄成)하였고 광주 청계사에 보관 하였는데 대종의 무게는 7백근」이라 새겨있다. 이 명문에는 청계산이 청룡산으로 청(淸)자가 청(靑)자로 써 있다.
청계사에서 소장하고 있는 불교 경판은 목판으로 경기도지정유형문화재 135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경판수는 18부 466판으로 구성되어 있다.
광주 학현(현 의왕시 학의동) 출신으로 박성삼은 의병대장 윤기의 부하가 되어 1907년 11월 20일경 의왕 청계산 위에서 일본 순사대와 교전하여 패퇴하고 그 후 경기도를 횡행하여 융희 2년 2월경까지 경기도 각 곳에서 군량 및 군용자금을 징탈하였다는 이유로 경성지방재판소에서 유형 5년을 받았다.
광주 의곡면(현 의왕시 포일동) 출신으로 1932년 조선어학회 간사로 피선되어 36년간 중임하였으며 1942년 10월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피검되어 홍원경찰서와 함흥형무소에서 3년간 투옥되었다가 1945년 8.15 광복 후 출옥했다. 1962년 3월1일 건국공로훈장을 받았다.
수원군 의왕면 청계리(현 의왕시 청계동) 출신으로 성주복은 1919년 3월 5일 남대문 역전에서 조선독립 만세를 크게 외치면서 남대문을 향하고 동부 내로 행진하는 군중의 집단에 참가하여 독립만세를 절규하였다 하여 경성 지방법원에서 징역 6개월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의왕시 청계동 출신으로 3.1운동 당시 배재학당 출신인 친우 성주복,이복길 등과 결탁하여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그는 태극기를 준비하기 위하여 7일간 야간에 제작하여 각 리에 배포하였으며, 오리동 고개를 넘어가 고천 주재소 앞까지 만세를 부르고 현 내손동(갈뫼)으로 진출하면서 대형 태극기를 들고 선두에서 지휘해 가다 왜병의 총에 맞아 오른쪽 허벅다리에 관통상을 입음. 이후에도 계속하여 문맹퇴치운동에 힘써 청계 계명야학원을 설립하였다.
고려 말 조선초의 문신으로 초명은 윤으로 고려왕조가 망하자 조견은 통곡하고 두류산에 은거 하였다. 태조가 공의 재능을 아껴 탁용하려 하자 이름을 견이라 고치고, 자를 종견이라 고칠 정도로 고려에 대한 충성심이 컸다. 뒤에 청계산으로 옮겼는데 제일 높은 봉우리에 올라가 송경을 바라보며 통곡하기도 해서 그 봉우리를 망경대라 했다 한다. 죽은 후 태조는 평간의 시호를 내리고 둔촌에 장사 지내게 하였는데 둔촌은 고려 충신들의 절개를 후세에 전한 곳이기도 하다. 묘비에는 그의 유언에 의해「조견지묘」라는 네 글자만이 있을 뿐 관직명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이천 사람으로 공양왕 4년 장령이 되어 여러 간관들이 함께 조준, 정도전, 남은의 죄상을 밝히었는데, 정몽주가 죽음을 당하게 되자 일당으로 지목되어 귀양을 갔다. 고려가 멸망하자 서견은 금양(시흥)에 살면서 북녘을 향해 앉는 일이 없었으며, 종신토록 한양성을 마주하지 않았다 한다. 나라가 망하였는데도 끝까지 마음을 고치지 않았으니 그 충성이 대단하다 할 수 있다. 금천(시흥)의 번당(현 서울 성남고교 자리)에 서견의 묘가 있는데 선조 때에 충신의 묘로 봉해졌으며, 1938년 의왕시 포일동 산 82로 이장되었다.
김충백의 자는 군서이다. 천성적으로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임진왜란 때에는 어머니를 모시고 피난하였는데, 잠시 어머니를 잃어버려 죽음을 무릅쓰고 백방으로 찾아 헤맸다. 어머니는 적에게 붙잡혀 있었는데 적은 그의 효심의 지극함을 알고 위로한 후 어머니를 돌려 보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 충백은 여묘를 지어 3년을 살면서 친히 불을 지피고 아침, 저녁으로 슬피 추모하였다. 묘는 의왕시 왕곡동 왕림에 있다.
한성우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여윤이다.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를 받들어 모시는데 정성을 다하였고 공이 병이 나거나, 유고한 일이 아니면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않았다. 부모를 모시는 사람은 의술을 몰라서는 안된다고 하며 의술을 대략 깨우쳤으며 부모가 돌아가실 때는 매우 슬퍼하였고, 묘옆에 움막을 짓고 곡을 함에 있어서도 풍우를 피하지 않고 정성으로 묘를 돌보았다. 효성은 친·외가를 가리지 않아 외선조의 비각을 손수 세웠다. 두 형을 엄부와 같이 섬겼으며, 막내 동생의 궁핍함을 없게 하고 아버지를 여읜 조카를 정성으로 가르치고 이끄니 효성과 동기간의 우애가 천성적이라 하겠다. 묘는 의왕시 이동 창말에 있다.
강우창은 조선 후기 사람으로 왕륜면(현 의왕시)에서 생거하였다. 효성이 지극하여 감동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조선에서는 그의 지극한 효성을 알고 호조좌랑에 추증하였다.
홍씨는 사인 김약연의 처로 지아비의 병이 위독해지자 부모님께 자결할 것을 고하고 지아비가 죽으니 시부모님께 자결할 것을 알렸고, 아무것도 먹지 않으니 시부모가 만류하였다. 홍씨는 「9일이 지나도 죽지 않으면 식사를 하겠다」고 하였으나 죽지않자 23일째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 경내의 사람들이 그 효열의 상황을 받들어 왕께서 순영할 때 올리니 정려를 세우게 하였다. 김약연과 그 부인 홍씨는 의왕시 왕곡동 왕림에 살았다.
이씨는 강택부의 처로 왕륜면(현 의왕시)에 생거하였다. 이씨는 절개를 지키며 순절하였으므로 정문이 세워졌다.
이씨는 효자 박담의 처로 양녕대군의 후손이며, 의곡면(현 의왕시)에서 생거 하였다. 밤에 도적이 침입하였는데, 박담의 노모가 방 안에 있었으므로 이씨는 달려가 노모를 구하였다. 도적의 무리가 박담을 향해 칼을 뽑자 남편을 감싸고 대신 칼에 찔렸다. 도적이 그 행동에 놀라 감탄하고 풀어 주었으나 끝내 죽었다. 후에 그 가상함을 알리고자 정문을 세웠다.
효부 이씨는 화성군 동탄면 금곡리 이수상씨의 맏딸로 19세에 의왕시 삼동 신현찬과 결혼하였으며, 결혼 2년 후 한국전쟁 당시 남편이 전사하였다. 이씨는 20세에 청상이 되어 육순 시어른과 4대의 9식구를 맡았으며, 넉넉치 못한 농토로 아들을 잘 기르고 시부모를 잘 모셨다. 논밭은 3,000여평으로 늘었고, 아들은 미국에 유학 MIT공대에서 유전공학의 세계적 권위자가 되었으며, 시조모님께서는 장수하여 백세에 이르렀다. 1987년 효행대상(삼성문화재단)을 수상했다.
지정구분 | 문화재명 | 소재지 | 지정번호 및 일시 |
국가 지정 유형문화재 | 동제은입사향 안 | 내손동 643-13 (곽영대씨 소유) | 보물 제288호('63.1.21) |
제왕운기상'하 | 보물 제418호('65.4.1) | ||
삼국유사 | 보물 제419호('63.4.1) | ||
청계사 동종 | 청계동 11 | 제11-7호(2000.2.15) | |
회원(우배선의 병진군공책) | 내손동771(우국일씨소유) | 보물 제1334호(2002.1.12) | |
경기도 지정 유형문화재 | 검재 김유선생 영정 | 왕곡동40(청풍 김씨 종중소유) | 제117호('88.12.2) |
청계사 목판 | 청계동 11 | 제135호('88.9.12) | |
경기도 지정 문화재자료 | 청계사 | 청계동 11 | 제6호('83.9.19) |
임영대군묘역 및 사당 | 내손동 산 154-1 | 제98호(2000.4.17) | |
경기도 지정 기념물 | 하우현성당 사제관 | 청계동 201 | 제176호(2001.1.22) |
전통사찰 | 백운사 | 왕곡동 산3 | 제36호('88.7.27) |
향토유적 | 한익모 선생묘 | 월암동 산26 | 제1호('89.1.1) |
채세영선생묘 및 신도비 | 포일동 산12 | 제2호('89.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