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왕의 지명유래
의왕시의 유래는 광주목에 속했을때 의곡면의 의자와 왕륜면의 왕자를 따서 의왕면이라 하였습니다.
<여지도서>의 광주 의곡면은 1리와 2리로 구분되어 있고 더 이상 세분된 마을명이 나타나지 않으나 그후 광주 의곡면은 손동, 갈산동, 포우동, 청계동, 학현, 어일리로 되어 있어 '청계동'이 등장된다. 이 청계는 아마도 현재 청계산을 옛날에는 <동국여지승람>이나 <남한지>등 문헌이나 청계사사적기비의 기록에서 보듯 '일명 청계산'이라 하여 과천 관악산을 '우백호'라 칭한다면 '우청룡산'에 해당하므로 이 청룡산 계곡을 따라 이루어진 마을이 靑溪 또는 淸溪가 된 것으로 여겨진다
청계마을의 '농골'은 봉담→의왕→과천고속도로 중 과천터널 바로 옆의 남동쪽에 위치한 마을을 말한다. 고속도로가 나고 터널이 뚫려 마을이 둘로 갈라지게 되었으나 서쪽보다는 동쪽 남은 집들이 훨씬 많다. 이곳은 조선초기 음성박씨 후손인 박연 (진안 현감 역임)이 관직에서 물러난후 여기서 은둔 생활을 하던 곳으로 아호가 노은이므로 '노은골'로 칭했던 점차 음운탈락과 변동으로 '농골'로 변한 땅이름으로 여겨진다.
'옥박골'은 한직골에서 청계사로 가는 초입길 왼쪽에 오목하게 들어간 마을 이름이다.<始興郡誌>下(p. 986) 지명유래 자료에 따르면 조선시대에 이곳에 죄인을 가두는 '옥(獄)'이 있었으므로 '옥박골'이라 했는데, 그후 옥이 철거되면서 그 주변 일대를 '옥터밭'이라 부르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일석 선생께서 들려주신 바에 의하면 '한직골'은 '한적골'이 변한 이름이라 하였다. 이곳이 옛날에는 마을이 없었던 곳으로 인덕원에서 광주쪽으로 가는 길목으로 한적한 곳이라는 의미로 '한적골'이었는데, 발음의 편의상 '한직골'로 부른다는 것이 다. 현재 청계동 사무소가 위치한 곳의 동남쪽 부근 망르이 바로 이 마을로 이곳에 전해지는 지명유래는 이곳은 예로부터 지대가 높아 논은 별로없고 들판이 사질토(沙質土)이므로 어떤 곡식도 잘되지 않고 가물면 이내 작물이 旱災를 입어 시들고 말라죽어 '한재골(旱災洞)'이라 흔히 불리어 왔는데 현재는 '한직골'로 통칭한다고 밝혀 있다.
'하오개'는 이 고개가 '학고개' 였으나 '학고개>하오개>하우개'로 음운변천에 따라 '하오개'또는 '하우개'개 되고 이를 바탕으로 성당이 있는 마을(청계13통)을 흔히 '하우개'마을로 지칭되기도 한다.
넓은 들판 모퉁이 마을이란 뜻에서 한자지명으로 '포우리(浦隅理)', 고유어로는 '벌모루'라 칭한다.
벌모루와 이미 사이에 자리잡은 마을로 마을 주위가 마치 성을 에워싼듯한 형상으로 되어 있어 '성고개'라고 불렀을 듯하다. 이미 이 마을은 서울구치소와 성고개 마을 동북으로 자리잡은 마을로 이 말을에 큰 나무(느티나무) 두그루가 있어 마치 숲을 이룬 것과 같으므로 '임이(林二)'라 칭했다는 것이다.
1914년 4월 1일 부령 제111호에 의하여 일제가 행정구역 통폐합하기 전에는 두 개의 큰 자연부락명인 학현동과 의일외동이 있었는데 통폐합하는 과정에서 두 지명의 첫글자를 각각 취하여 '학의리'로 개칭하게 되었다. 학현동은 크게 샛터말(미나리 골), 학현(웃말), 점말(아랫말)의 자연마을이 있고 학의2리에 해당하는 의일동은 '오른계, 속말, 북골, 양지말'로 자연마을을 이루고 있다.
현 의왕시 학의2동을 지칭하는 전통적 명칭은 '의일'이다. '의'를 발음할 때 단모음화시킨 발음을 대충 한자 '어'자로 취음 하여 표기한 결과라 할 수 있다.
능안은 백운호수 서남쪽 모락산 아래에 자리잡은 마을로 세종의 넷째아들인 임영대군의 묘지가 있는 마을이다. 구전에 의하면 "조선 제17대 임금인 효종이 승하하자 현재의 임영대군 묘자리가 묘지 후보지로 선정되기에 이르렀는데 효종과 임영대군은 같은 왕족인 관계로 효종의 묘소를 여주로 다시 정했다고 한다. 그때부터 이 마을을 능 후보지였다 하여 '능안말'이라 일컬어 오게 되었다.
조선시대 광주군 의곡면의 의일내동, 손동, 가산동을 1914년 부령 제111호에 의해 군면동 통폐합시 '의일내동'의 '내'와 '손동'의 '손'자를 따서 '내손동'이라 하여 수원군 의왕면 내손리가 되었다. 그후 1936년 10월 1일 일왕면 내손리, 다시 1949년 8월 5일 화성군 일왕면 내손리, 1963년 1월 1일 시흥군 의왕면 내손리, 1980년 12월 1일 의왕면 내손리, 1990년 1월 1일 의왕시 내손동으로 되었다. 현대 내손동은 청계동 관내의 능안마을과는 다른 내손동 관할에 속하게 되었다. 따라서 현 내손동은 과거의 '손골'과 '갈미'는 물론 '민백이'마을 및 포일, 대우아파트 단지를 관할하는 큰 취락을 관장하게 되어 행정동도 둘로 갈라 '내손1, 2동'으로 분동하고 있다.
오전동은 '오마동'의 '오'와 '전주동'의 '전'을 따서 1914년 지명 통폐합시 '오전동'이라 하여 수원군 의왕면 오전리로 된후 현재의 '오전동'에 이르기까지 수원군 일왕면, 화성군 일왕면, 시흥군 의왕면, 시흥군, 의왕읍 등의 오전리로 되었다가 의왕시 오전동으로 발전해 왔다.
오매기는 <구한명람> 및 <신구조명람>에는 '오전동'으로 기록된 마을로 고천에서 학의동이나 능안마을로 갈 때, 용머리, 산악골, 가운뎃말, 목배미, 뒷골, 배운산(백운산) 전체를 가리키는 이름으로 그 유래는 오마동보다 '다섯집매'에 해당하는'오막동'에 더 근거가 있을 듯 하다.
'산악골'은 오매기 마을 입구에서 장고개로 넘어가는 어귀 마을이다. 이 마을 이름은 이제까지 올바르게 알려져 있지 않다. 때로는 '산악골', '사낙골'로 기록하고 있다.
조선시대 광주군 왕륜면 평사면(벌사근네), 고정동(골우물), 고고리(고고리), 내곡동(안골)등을 1914년 부령 제111호에 의해 통폐합할 때 '고정동, 고고리'의 '고'자와 '평사천'의 '천'자를 따서 '고천'으로 통폐합하였다.
이 마을은 통미 건너편 현 과천-봉담 고속도로가 경수 산업도로와 교차하는 지점의 서편마을이다. 이 마을은 한자로 '고고리' 로 표기하느 자체가 이 마을의 유래를 얼른 알 수 없게 한다. '고고리'는 원래 '골골이 '에서 연유된 이름임이 거의 확실시 된다.
이 마을은 현 의왕시 남쪽 마을로 이 마을명의 유래는 실제 제보자의 제보에서도 확인되듯이 예전에는 이 마을이 위치한 오봉산 동남 골짜기에 우물이 있어 '골우물'이라 불렀는데, 이것이 이 마을을 지칭하는 이름으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의왕시'는 조선시대가지 거슬러 올라가면 광주군에 속했던 지역으로 광주군 의곡면과 광주군 왕륜면에 해당되었다. 그런데 이 지역 역시 일제의 행정구역 통합정책에 의해 각각 머리 한자씩 취하여 지명이 완성되었는데 '義王'이 아닌 '儀旺'으로 둔갑되어 등장하였다.
백운산은 높이가 564m인 산으로 광수산에서 북서로 이어진 첫봉우리로 용인군 수지면 고기리와 의왕시 왕곡, 학의동의 경계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모락산은 일명 '갈산(葛山)'이라고도 하면 경기도 의왕시 내손동의 능안과 갈미 및 오전동의 성나자로원과 오매기가 둘러 싸고 있는 높이 385m의 산이다.
고분재는 학의동(청계2통) 속말에서 용인군 수지면 고기리로 넘어가는 고개 이름이다.
'지지대'고개는 의왕시 왕곡동(골사그네)에서 수원시 파장동으로 넘어가는 고개 이름이다. 정조 임금이 수원 현륭원 원행에 취해진 거둥이 11차에 걸쳐 이루어진 것은 주지의 사실로 3차 현륭원 전배를 마치고 1월 26일 환궁하는 길에 잠시 쉬었다. 이때 정조는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발을 멈춰 경들을 소견하는 것은 환궁하는 자기의 발걸음이 차마 발을 속히 뗄수 없는 심정 이므로 더디게 발걸음을 옮기는 것이라고 애틋한 심정을 토로하였다. 그리하여 이때부터 이곳을 '지지대'라 명명하게 되었다.
의왕시 오전동 오매기 마을 앞 남쪽에 동그랗고 볼록하게 생긴 산이다. 전주 강씨의 선대묘가 있어 강산이라 부른다고 하나 이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우연의 일치라고 보아지며 실은 예부터 '동그란산'으로 불러 왔다는 데 우리는 주목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