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왕의 설화

의왕시의 각 지역에 얽힌 재미있는 전설이야기. 다양한 문화와 깨끗한 자연을 향유할 수 있는 문화도시 의왕

01

- 청계산에 숨어 있던 고려 유신

시흥군 과천면 막계리 (현 과천시 막계동)에는 명악인 관악과 마주 선 청계산이 있다.


청계사의 옛 이름은 청룡산으로 이 산정에는 청룡이 승천했다고 전한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산정에 석대가 하나 있는데 이것이 바로 망천대이다. 망천은 원래 만경(萬景)이라 하여 산정석대에 오르면 눈아래에 만경이 전개된다는 데서 유래한 이름이었으나 고려말을 지나 죽촌망혜(竹村芒鞋)로 초라한 선비 한 사람이 이 만경대에 오른 후에 만경이 망천으로 이름까지 바뀌었으니 이 행색이 초라한 선비야말로 고려왕조의 최후를 몸소 겪고 고려왕조의 송도를 탈출하여 망명의 길을 떠났던 고려 한 사람인 조견(1374-1429)이었다.


조견은 고려왕조를 빛낸 이름난 선비요 중신으로 두문동(杜門洞) 72인 중의 한명이었다.


고려의 신하이던 이방원이 고려왕조의 충신 포은 정몽주를 선죽교에서 죽이자 지금까지 고려왕조에 충성을 다하던 이름난 신하들은 신라시대부터 깊이 뿌리박힌 '열녀는 두명의 지아비를 섬기지 않고,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를 부르짖고 일어났으니 먼저 청계사에 들어있던 이색을 위시하여 조견, 길재 등이 바로 그 사람들이다. 이렇게 되고 보니 이성계는 소원을 이루어 왕위에는 올랐으나 신하 없는 왕이었고 백성이 따르지 않는 초라한 존재가 되고 말았다. 단지 그에게는 정도전, 조준, 배극염 등의 신하 몇 명이 따를 뿐이었다.


문무의 이름난 신하들은 두문동으로 삿갓을 쓰고 사라지고 백성들은 이성계를 욕하며 천시하고 고려의 서울 송도에는 사람의 그림자조차 볼 수 없었다. 아연실색한 이성계는 포은을 죽인 것을 후회했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조선의 개국이래 처음으로 내란을 일으킨 것도 정도전이었다. 즉 정도전은 태조의 둘째 부인 신덕왕후 강씨의 소생인 의안군 방석을 세자로 봉하고자 첫째 부인 신의왕후 한씨의 소생인 모든 왕자를 모살하려다가 발각이 되어 정안대군에게 죽었으니 이것이 곧 조선조 제1차의 난인 정도전난이다. 이성계는 궁여지책으로 시험을 치러 인재를 구하기로 하고 널리 과거통문을 냈으나 문무에 응시한 것은 시골뜨기 밖에 없었다. 그래서 다시 고려의 신하들의 뒤를 쫓았으나 하나도 따르려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색이 초청을 받고 궁에 들자 이성계는 나아가 맞아 들였으나 왕좌에 오르는 것을 본 이색은, "옛정을 잊지 않기 위하여 찾음이요, 형에게 신하의 도리를 다하러 찾아 왔음은 아니노라" 한마디를 남기고 물러났고 명신 길재는 조선조가 부여한 '박사'호도 물리치고 입궁도 않은 채 어머니를 공양하기 위하여 입산한다는 편지만 전하고 사라졌다.


김자수 또한 대여섯번의 초청에 못이기어 사당에 들어 최후를 고하고 음독자살로 이성계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마지막으로 불린 것이 바로 조견이었으니 그는 자기의 이름이 조선조의 공신록에 오른 것을 실소하며 "이는 형이 아우를 아낌이 아니라 아우를 욕함이 크외다." 하고 이성계에 붙은 형을 조롱하고서 이성계가 준 호조판서의 벼슬을 반환하였다. 그리고 이름을 견()으로 고치고, 자를 종견이라 했으니, 나라와 임금을 잃고도 죽지 못하니 '개와 같다'함이었다. "아우 조종견은 물러가오. 형은 역신의 영화를 길이길이 누리시오" 이렇게 형과 조선왕조를 버린 조견은 광주의 깊은 산을 찾아 헤매며 봉우리에서 봉우리로 골짜기에서 골짝으로 개의 울음소리를 피하여 어느 높은 봉에 오르니 이 곳이 바로 청계산이다.


산정에서 굽어보니 때마침 단풍이 한창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경치라도 나라와 임금을 잃고 죽을 자리를 찾아 다니는 조견의 마음을 즐겁게 해 주지는 못했으니 멀리 송경에 사무친 정은 통곡이 되어 터져 나왔다. 그는 오직 나라를 잃고 임금을 잃고도 죽지 못하는 자신이 원망스러울 뿐이었다. " 아 내 어찌 죽지 못하노" 이렇게 서울 송도를 바라보며 울고 울다 쓰러져 자고 하기를 또 수십번, 이를 전해들은 사람들도 조견의 슬픔에 동정하여 만경대(萬景臺)를 망경대(望京臺)라 부르게 되었다. 조견이 청계산정에 들었다는 소문을 전해 들은 이태조는 그의 충절에 깊이 감동하고 그 충절을 조선왕조로 돌려보기 위해 친히 청계산으로 조견을 찾아 왕조로 돌아오기를 권하기 여러번 하였으나, 조견은 멀리 송경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릴 뿐 아무 말이 없었다.


이에 조견의 마음을 굽힐 수 없음을 깨달은 이성계는 "우리 왕조에는 역신이나 그 뜻이 장한지고" 한마디를 남기고 쓸쓸히 돌아갔다. 돌아가서는 그대로 조견을 못잊어 산정에 초막을 짓게 하여 비를 피하게 하였으나 조견은 그 초막이 보기 싫다하여 또 다시 청계산을 떠나 양주 깊은 산으로 발을 옮기었다. 이 초막이 있던 자리가 오늘의 망경대다.

02

- 오봉산의 전설

의왕시 고천동에 오봉산이 있다. 원래 산봉우리가 다섯개여서 五峯山 이라고 하였는데 언제부터인가 ""이 ""으로 바뀌어 근자에는 "五鳳山"이라고 지도에까지 표기되어 있는 산이다. 이 산은 의왕시 왕곡동에서 시청 쪽으로 오려면 경수산업도로 건너편으로 봉우리 다섯 개가 나란히 바라다 보이고 그 끝에 한 봉우리가 더있어 봉우리 여섯 개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러니까 어쨌든 五峯山 이라는 표기가 맞는 것이라고 이 마을 古老들은 말하고 있다. 그런데 이 오봉산에 얽힌 전설이 의왕시 왕곡동에 있는 청풍김씨의 문중에 전해지고 있으며, 이 이야기는 또한 의왕시의 古老들이면 누구나 알고 있는 꽤 오래된 것이다.


옛날에 중국에서 어떤 地術師가 무슨 계기로 그만 죄를 얻게 되어 그것도 역적이라는 죄명을 쓰고 목숨을 건지기 위하여 조선 땅으로 피신을 하게 되었다. 겨우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도망하여 온 터라 가진 것도 없고 하여 별로 먹지도 못하고 제대로 입지도 못하여 기진맥진한 모습으로 이 곳 의왕시까지 와 저자거리의 한 구석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런데 우연한 계기로 그 초라한 초립동이 차림의 중국사람 곁에 앉았던 청풍김씨 한 분이 그를 딱하게 여기고 집으로 데리고 와 음식을 주고 옷도 새로 마련하여 주면서 며칠 쉬다가 가라고 하였다. 그런데 마침 그 때 그 청풍김씨댁 할머니가 중환이어서 매우 위독한 상태로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이에 그 중국 지관은 할머니의 병환을 살피더니 도저히 소생할 가망이 없음을 판단하고 청풍김씨에게 말을 이렇게 건네었다. " 아무것도 모르는 저이지만 노부인의 병환으로 아무래도 회춘하시기가 어려운 고비까지 이른 것 같습니다.


타국에 와 생면부지인 당신을 만나 나는 겨우 고생을 벗어나 이제 몸도 다 회복하였습니다. 이에 당신께 고마움을 표시해야 할 아무것도 지니지 못하였으나, 다만 중국에서 약간 배운 기술이 있는지라 저 노부인을 모실 산소라도 하나 보아 추천하겠습니다." 청풍김씨는 이 중국 지관의 말이 하도 고마워 함께 산소자리를 보러 나섰다. 저 앞에 바라보이는 오봉산을 건너다 보고 함께 그리로 가자 하였다. 중국 지관의 뒤를 따라 오봉산에 이르러 그 뒤편으로 가니 어느 집 한 채가 있는 곳까지 가서 이 집터가 고지라고 일러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광중이 될 자리까지 지정하여 주는데 그 자리란 바로 그 집의 장독대가 있는 지점이었다.


청풍김씨는 딱하였다. 아무리 자기 노모님을 모실 자리로서 명당을 추천받았다 하지만 어엿이 살림을 차리고 있는 집에 들어가 그 집터를 산소자리로 양보해 달라고 하기가 어려웠다. 여러 시간을 끙끙거리다가 큰 마음을 먹고 그 집에 들어가 자초지종을 이야기하고 찾아온 뜻을 말하였다. 처음부터 승낙을 받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나 역시 그랬다. 뿐만 아니라 그 집 주인에게는 이만저만한 노여움을 산 게 아니었다.


청풍김씨는 결국 사과의 말을 하고는 되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일이 벌어진 것이었다. 청풍김씨가 그 집터에서 돌아온 그날 밤에, 그러니까 집터를 산소 자리로 양보하여 달라고 말을 건네었다가 오히려 잘못되었다고 사과까지 하고 돌아온 그날 밤에 어찌된 영문인지 오봉산 뒤, 그 집에 불이 나서 몽땅 타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바로 그날 밤 또한 이 청풍김씨 댁 노부인도 그 시각에 운명하고 말았다. 마을에서는 이야기 거리가 생겼다. 멀쩡히 집짓고 사는 이에게 산소자리로 내어 달라고 한 것도 이야기 거리인데, 거절하였더니 그날 밤으로 이상하게도 원인 모를 불이 나 집 한채를 몽땅 태웠고, 그뿐 아니라 청풍김씨댁 노부인이 또한 시간을 맞추어 운명하셨으니 더욱 그러하였다. 따라서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청풍 김씨네에서 그 집터를 산소자리로 하려고 일부러 불을 질렀다느니, 혹은 불이 난 것은 그 집터가 청풍김씨네 노부인 산소자리로 이미 하늘이 정해 준 것이어서 그렇다느니, 그것은 하필이면 그 불이 난 밤에 노부인이 운명하실 것이 무엇이냐? 그것으로도 이미 하늘이 정하여 준 것이다 등등 말은 꼬리를 물고 이어나갔다. 어쨌건 산소자리를 위한 이야기가 당시 양가 사이에서 시작되었고 결국은 원만한 합의를 얻어 그 타버린 집터에 청풍김씨는 묘를 쓰게 되었다.


장사를 치르기 전날 중국에서 온 지술사는 다시 청풍김씨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이제 노부인을 모실 자리도 확정되었으니 저로서도 그간의 은혜에 보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만 한가지 꼭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이는 꼭 지켜주시기 바랍니다. 노부인을 모시기 위하여 땅을 파서 광중을 만들 때 얼마큼 파 내려가면 펑퍼짐한 돌이 부딪칠 것입니다. 그러면 그 이상 더 파지 마십시오. 꼭 지켜야 합니다." 그리고는 다시 옷을 가다듬어 입고는 이번엔 떠나는 인사를 하였다. "이제 저는 중국으로 돌아갈 때가 되었습니다. 건곤(乾坤)을 보아하니 죄명이 누명으로 밝혀져 역적의 누명이 깨끗이 씻겼습니다. 저는 이제 떠나야 합니다. 거듭 부탁드리겠는데 광중에 펑퍼짐한 돌이 나타나거든 그 이상 더 파내려가지 마시고 그 돌 위에다 그냥 하관하시기를 바랍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하더니 훌쩍 길을 떠나 중국으로 돌아가 버렸다. 드디어 장례날이 되었다.


산역을 하고 상여를 모시고 온 집안이 떠들썩 하였다. 산소자리까지 상여를 모시러가 광중이 다 되기를 기다리면서 때를 기다리고 있는데 일하던 사람이 웅성거리기 시작하였다. 광중을 파는 주위에서 꾸부리고 있던 화장꾼들도 한 몫 거들고 있었다. "더 파야지. 너무 얕지 않아?" "아냐, 그만 파라고 했어. 여기 봐. 돌이 놓여있지 않아?" "그렇지만 이렇게 광중이 얕아서야 …""상관없어, 더 파지 마.""이럴 게 아니라 상주에게 직접 보이고 결정하세." 결국은 상주인 청풍김씨에게 가서 이 사실을 이야기하고 처분을 바랬다. 청풍김씨는 이 이야기를 듣더니 직접 가 보았다. 분명히 중국 지관이 말한 대로다. 그러나 광중으로서는 너무 얕아 보였다.


그도 혼자 결정하기가 망설여졌다. 그래서 일단 작업을 중단시키고 급히 가족회의를 열기 위하여 산소 가까운 곳에 대기중인 상여 앞으로 가서 구수회의를 가졌다. 이 때 광중을 파던 산역꾼들도 한동안 쉬기 위하여 광중으로부터 멀리 떠나 나무그늘 밑으로 갔고, 다만 청풍김씨네 막내 아우만이 홀로 광중을 지키고 있었다. 원래 광중을 파게 되면 반드시 누군가가 지키고 있게 마련이다. 혼자 광중을 지키고 있던 막내는 지금 말썽이 되고 있는 펑퍼짐한 돌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그리고는 슬며시 광중으로 들어섰다. 다시 그 펑퍼짐한 돌 위에 올라 서 봤다. 그런즉 밑에 무슨 돌이 있는지 어떤지 그 돌이 기우뚱거렸다. 무심코 그는 그 돌 한쪽 끝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그 밑을 내려다 보았다. 이게 웬일인가? 그 펑퍼짐한, 흡사 구들장 같은 돌을 들어 올리면서 내려다 보는 순간, 그는 '윽!' 하면서 다시 돌을 놓아 버렸다. 그 순간 무엇인가 둔탁한 소리를 내며 부러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는 그 넓적한 돌은 제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다시 그 막내는 놀랜 가슴을 어루만지면서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 돌 아래 펼쳐졌던 광경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 돌 밑에는 돌로 된 옥동자 다섯 개가 앉아 있었고, 그들을 향하여 그들 보다 조금 더 큰 옥동자 하나가 서 있었다. 흡사 옥동자 다섯에게 무엇인가 일러주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다시 이 막내는 너무 놀라 쳐들었던 돌을 놓는 순간 무엇인가 부러지는 듯한 소리를 생각하고는 그 돌 위에서 이 구석, 저구석 밟아 보았다. 그런데 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돌을 쳐들기 전까지는 기우뚱거리던 그 넓적한 돌이 이젠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꽉 제자리에 이가 맞은 듯이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제야 아까 무엇인가 부러지는 듯한 소리는 바로 그 다섯 개 옥동자 앞에 서 있던 옥동자의 머리가 부러진 것으로 여겨졌고, 그 머리가 부러지기 전에 그 넓은 돌이 그 키에 걸려서 기우뚱거렸을 것임이 분명하였다. 이윽고 상여 앞에서 긴급 가족회의를 열면서 광중의 돌을 제거할 것인가 말 것인가 를 의논하였으나 끝내는 중국 지술사의 말을 따르기로 하고 그 돌위에 그냥 하관을 하고서 묘를 만들었다.


산소가 다 치성되고 나서도 이 막내는 그러한 광경이 너무나 무서워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 산소에 관한 비밀은 이 막내만이 알고 그냥 지켜져 온 것이다. 한편 중국으로 돌아간 지술사는 자기 아버지에게서 꾸중을 듣게 되었으니, 갖은 고생을 겨우 끝내고 집에 돌아온 아들에게 이렇게 나무라는 것이었다. "보아하니 너는 너의 목숨을 아껴주고 구해준 조선땅의 청풍김씨 댁을 은혜는 못 갚을지언정 역적의 집안으로 인도하였으니 그럴 수가 있느냐. 어서 되돌아가서 그 산소를 옮기도록 하여라." 아들이 그 연유를 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조선 땅에서는 가장 좋은 길지로 은혜를 갚았다고 생각되는데요." "아직 멀었다. 너는 아직 모르는 것이 있다. 그 자리는 5정승을 거느리고 역적 모의를 하는 또 하나의 옥동자가 있었느니라. 그가 바로 그 집안을 역적의 집안으로 만들 후손이니라." 중국의 지술사는 새삼 자기 아버지의 지혜에 탄복하고 그 길로 다시 조선으로 건너와 청풍김씨댁을 찾았다. 뜻하지 않게 다시 만난 청풍김씨 댁에서는 이만저만 반가운 것이 아니었다.


중국의 지관은 들어서자마자 자기가 잡아준 산소를 다른 곳으로 옮기자고 제의하면서 서둘렀다. 그 때의 청풍김씨의 막내도 한자리에 있었다. 이제는 더 숨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니 숨겨서는 안되겠다고 판단을 하자 그제서야 여러 사람들, 즉 집안식구와 중국 지관앞에서 그 날, 장례식날 광중에서 겪은 일을 모조리 차근차근 이야기하였다. 자초지종을 듣고 난 중국 지관은 그제야 한숨을 푹 쉬면서,"그럼 되었고, 그 부러진 것이 바로 다섯 개 옥동자 앞에 서 있던 옥동자의 목이 틀림없소. 그렇다면 이제 역적은 사라지고 그 대신 정승이, 그것도 6정승이 나올 것입니다." 하면서 저으니 마음을 놓는 듯 하였다.


그 후에 정말로 이 청풍김씨 집안에는 6정승이 계속 쏟아져 나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저 오봉산 봉우리가 그 산 이름처럼 다섯 개지만 사실은 가만히 바라보면 한쪽 끝에 또 하나의 작은 봉우리가 있음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것이야말로 모두 여섯 개 봉우리, 즉 6정승을 암시하는 것이라고들 말하고 있다.

03

- 오봉산의 아기장수 전설

군포시 당정동 새전마을에서 의왕시로 넘어가는 길 옆에 커다란 바위가 있다. 이를 '오봉산 장군바위'라고 하는데 이 바위에 얽힌 아기장수 전설이 전해져 내려온다. 아주 옛날에 살림이 매우 어려운 아낙네가 옥동자를 낳았다. 워낙 살림이 가난하여 아기를 낳자마자 우물에 나가 쌀을 씻어 솥을 앉히고 방에 들어와 보니 아기가 간 곳이 없었다.여기저기 둘러 보았으나 눈에 띄지 않았는데, 이윽고 그 아기가 천장에 올라가 붙어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산모는 신기함보다는 두려움이 앞섰다. 얼른 끌어 내려 몸을 자세히 살펴보니 갓난아기의 옆구리에 날개가 돋아 있었다. 기겁을 한 산모는 이 아이가 보통 아이가 아님을 깨달았다. 그리고 이어 뇌리를 스쳐지나간 것은 '역적'이라는 무시무시한 말이었다. 이 아이가 범상이 아니라면 반드시 자라나서 엉뚱한 행동을 할 것임에 틀림없고, 그렇게 되면 집안의 앞날은 뻔한 노릇이었다. 따라서 얼른 문 밖으로 나가 뜰에 놓여 있던 큼직한 맷돌 밑장을 들고 왔다. 그리고 갓난 아이를 이불로 덮고 그 위에 맷돌짝을 올려 놓았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그 순간 뒷산인 오봉산에서 용마가 나와 바위 위로 뛰어내려 오다가 그만 무릎을 꿇고 죽었다. 그 용마는 이 집에 태어난 아기장수를 태워서 하늘로 오르기 위하여 기다리던 말이었는데, 그만 아이가 숨을 거두는 순간 용마도 함께 죽었다는 것이다. 그 후로 이 바위에서는 흡사 말 발굽 같은 자국이 남았고 세상 사람들도 이 아기장수와 용마의 이야기를 믿으면서 오늘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다.

04

- 정삼품의 당상 소나무 전설

의왕시 오전동에 모락산이 있는데 거기에는 당상인 정3품 직함을 지닌 소나무가 있었다. 지금은 그 소나무가 병들어 말라 죽어서 모습을 볼 수 없고 다만 이 소나무에 얽힌 전설만이 전해지고 있다. 조선조의 정조대왕은 효행으로 이름난 왕이었다. 비명에 일생을 마친 부친인 사도세자의 능을 화산에 쓰고는 1년에 한차례 이상씩 꼭 성묘를 하였다. 드디어는 수원성을 축조하리만큼 자기 부왕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치기도 한 왕이었다. 당시에 정조가 한양에서 화산의 자기 부왕 능까지 가는 노정은 대체로, 과천 남태령을 넘어 인덕원에서 쉬었다가 다시 지지대고개를 거쳐서 거동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인덕원에서 지지대고개를 넘어 설 때까지 계속 이 모락산의 커다란 소나무가 시야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그리하여 정조는 그 소나무가 자기의 행차를 계속 바라보면서 호위하고 있는 것으로 느끼어 기특하다 하여 정3품 벼슬을 내렸다는 것이다. 그 후로 이 소나무는 정3품벼슬로서 대우를 계속 누리다가 얼마전에 말라 죽어 지금은 그 모습을 볼 수 없게 되었다.

05

- 모락산의 비극

의왕시 오전동과 내손동 서편에 우뚝 솟아 있는 산을 '모락산'이라고 한다. 한자로는 '慕洛山'이라고 쓰는데 근자에 나온 지도에는 누구의 잘못인지 '帽洛山'이라 표기되어 있어 조속히 바로 잡아야겠다고 이 곳 古老들은 말하고 있다. 이 모락산에 굴이 하나 있는데 이 굴에 얽힌 전설이 이 산의 명칭이 되었다는 민간어원설적인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임진왜란 때에 왜군이 물밀듯이 쳐들어와 이 곳까지 들이닥쳐 왔다. 온 마을 사람들은 난리를 피하여 간다는 것이 이 모락산 굴로 모두 숨어들어가 피신하였다. 그때 어린아이 하나만이 미쳐 굴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굴 밖에서 울고 있었는데 여기까지 쫓아온 왜군들은 이 아이를 발견하였다. 그리고는 온 마을에 사람 그림자라고는 없었는데 아이하나가 굴 앞에 서서 울고 있는 것을 보고는 온 마을 사람들이 그 굴 속으로 피신한 것이라 생각하고 그 굴 입구에 불을 질렀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이 그 굴 속에서 모두가 '몰아서 죽였다'하여 '모라 죽었다'에서 '모락산'으로 이름을 붙이게 된 것이라 한다. 그러니까 순 우리말로 붙인 이름이다. 옛날 세조가 어린 조카인 단종의 자리를 빼앗고 왕위에 오르자 사육신·생육신 등의 충신들이 일어났을 때 그 여파가 세종의 제4자이며 세조의 동기간인 임영대군에게까지 미치게 되자 임영대군은 장님으로 가장하여 이 모락산 기슭에 와서 숨어 살면서(혹은 장님이어서 세조가 차마 죽이지 않고 이 곳으로 귀양 보냈다고 함) 洛陽(중국의 수도 즉 한양을 뜻함)을 그리워 하면서 사모하던() 산 이었으므로 이로부터 산이름을 '사모할 모()','낙양의 낙()'으로 하여 '慕洛山' 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06

- 왕곡동에 전하는 전설

사육신의 한 분인 매죽헌(梅竹軒), 성삼문(成三門)은 훈민정음 창제 당시에 음운에 관한 식견을 넓히려고 원동(遠東) 땅에 머물러 있었던 중국 학자인 황찬(黃鑽)을 십여 번이나 찾아 갔던 일로도 유명하다. 이 성삼문이 한번은 사신으로서 중국에 가게 되어 그 곳에서 묶고 있었던 때의 일이라 하여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다. 객사에 짐을 풀고 쉬고 있으려니 그 객사의 방에 불을 때고 있는 한 머슴같은 사나이가 중얼중얼 무어라고 외고 있는 것 같아 주의력을 집중시켜 가만히 들어보니, 그 내용이 어떤 대문장가의 글인 것 같은데 공부를 꽤 하였다고 자부하는 성삼문으로서도 그 뜻을 파악하기 힘들 정도로 상당히 어려운 내용이었다. 그래서 한동안 듣고만 있다가 이윽고 밖으로 나가 아궁이 가까이 가서 머슴에게 말을 걸었다. "아니, 당신이 지금 외고 있는 글은 보통 글이 아닌데, 그런 어려운 글을 외면서 어찌하여 이런 객사에서 군불이나 때면서 지냅니까?"느닷없이 이런 질문을 받은 그 사나이는 힐끗 성삼문을 돌아다 보더니, "당신은 누구인데 나의 글 읽는 것을 들었소?" 하며 되물었다. 성삼문은 대답하였다."나는 조선 땅에서 이 나라에 사신으로 온 성삼문이란 사람이오." 그는 흠칫 놀라는 기색이더니 다시 이렇게 말하였다. "아! 그렇소? 당신이 조선에서 유명한 성삼문이란 학자란 말이요?" "유명할 것까지는 없지만, 과연 내가 성삼문이요.""그렇다면 내가 읊던 글귀를 잘 알 수 있을 텐데요. 그런데 그걸 잘 모르겠다니 이상하구려." 하면서 그 글은 저 유명한 아무개의 글로서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라면 대개 알 수 있는 글이라고 설명하였다. 성삼문은 그제야 그 글의 내용이 어떤 것이라고 어렴풋이 기억이 났지만 그 글을 읽은 것이 한번인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러고보니 이 사나이의 문장 수준이 자기와는 엄청나게 차이가 나는 것을 깨닫고 다시 이렇게 물었다. "아니 그렇다면, 그 정도의 문장 실력을 갖추었으면서도 어찌하여 벼슬길에 오르지 않고 비천한 생활로 고생을 하십니까?" 말씨부터 존댓말로 바뀌었다.그 사나이는 한숨을 푸욱 쉬고 나서 대답하였다. "나는 주지문이란 이름을 가진 사람입니다. 하기야 나라고 왜 과거를 보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과거에서 내가 적어 낸 문장의 내용을 알아 볼 수 없는 심사위원들이 어찌 내 글을 심사할 수 있었겠습니까? 즉 내가 쓴 글을 이해할 수가 없다 보니 언제나 나는 낙방을 한 것이고 몇 차례 그러다 보니 이젠 단념하고 말았고,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입에 풀칠 않을 수는 없고 하여 이렇게 지내고 있습니다." 성상문은 그의 말을 듣고 나서 이렇게 일러 주었다. "알만 합니다. 그러니까 당신의 글재주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였다는 말이구료. 아닌게 아니라 나 같아도 별 도리 없었겠습니다. 그러나 방법이 있습니다." 하고는 그에게 과거에 임하여서는 당신의 문장 실력을 십분 발휘하지를 말고 한 계단 낮추어서 쉽게 풀어 쓸 것을 가르쳐 주고 다시 그 실제 예를 들어 주면서 다시 한번 과거에 응하여 보라고 권하였다. 주지문은 성삼문에게서 자기가 지나치게 어렵게 알고 있던 내용을 아주 쉽게 배우면서 새삼 문장의 제모습을 파악하게 되었고 재미를 느끼면서 열심히 공부하였다. 그리하여 성삼문은 사신의 용무를 마치고 귀국한지 얼마 안되어 주지문은 드디어 과거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주지문이 급제하여 벼슬이 차차 오르고, 이윽고 무관으로서 높은 직함을 가지게 되었을 무렵에 조선의 성삼문은 저 유명한 수양대군의 단종 폐위에 항거하는 계략이 폭로되어 박팽년, 유응부, 이개, 하위지, 유성원 등과 함께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른바 사육신의 충절이 큰 회오리 바람을 일으켰던 것이다. 중국의 주지문은 자기가 몇 차례나 과거에 실패하고 객사의 군불을 때어 주면서 호구지책을 강구하던 차에 우연히 성삼문을 만나게 되고, 또한 그의 가르침을 입어 과거에 급제하게 되자 성삼문을 자기의 은인으로 굳게 생각하고 어떻게 하면 그 은혜에 보답할 것인가를 언제나 마음 속 깊이 새기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조선에서 변이 일어나 성삼문이 사형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자 분연히 일어섰다. "그렇다. 성삼문 선생이 살아 계신 동안 못 갚은 은혜를 지금 갚아 드림으로써 그 분의 원한을 풀어 드려야 한다."그길로 자기 휘하의 군사를 이끌고 조선을 향하여 발군하여 얼마간에 압록강 건너까지 당도하였다. 중국에서는 이러한 주지문의 군사행동을 알게 된 주지문의 친구 몇사람이 놀래어 급히 그를 따라 압록강까지 와서 군대를 쉬게 하고 있는 주지문을 겨우 만나 볼수가 있었다. "여보게, 주장군 어찌된 일인가? 휘하 군대를 다 이끌고 여기까지 오다니…."주지문의 행동의 저의를 알면서도 이렇게 물었다. 주지문은 결연히 이렇게 대답하였다. "음, 들어보게. 자네들은 내가 오늘이 있기까지 그 처음 계기를 만들어 준 분이 바로 조선의 성삼문이란 학자인 것을 그동안 내가 몇 차례이고 이야기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지?""그래, 기억하지. 그런데?" "그런데가 무엇인가? 그 성삼문이 이번에 수양대군 일파에게 몰리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것도 알고 있지?" "알고 있지""그래, 그럼 내 말을 자세히 듣게. 인간으로 태어나서 남의 은공을 입고 출세한 것을 잊어서는 안되지 않는가? 더구나 성삼문은 비록 목숨은 잃었으나 만고의 충신으로 길이 빛날, 그러한 위인일세. 안그런가?" 주지문의 친구들은 이 말을 부인할 수는 없었다. 어린 단종의 곁에서 선왕인 세종·문종의 부탁을 잊지 않고 오로지 충성을 바친 이야기는 중국 조야에서도 널리 평가되던 이야기였다. "들어 보게" 주지문의 말은 계속되었다."그 성삼문이 비명에 목숨을 잃은 그 한을 나는 풀어 주어야겠다고 마음 먹고 있네.""어떻게?""내 군사를 이끌고 조선 땅에 들어가 단종을 폐위시키고 뭇 충신들을 학살한 수양대군 일파를 모조리 응징할 생각일세." 주지문의 결의가 보통이 아님을 느끼고 친구들은 어안이 벙벙하였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그들 중 한 사람이 입을 열었다. "자네는 틀림없이 은공을 생각하여 성삼문의 한을 풀어 주어야겠다고 했지?" "그랬지.""그럼 내 말을 좀 들어보게" 그 친구는 이윽고 다음과 같은 논리를 세워 주지문의 행동을 견제하였다. "자네는 중국 천자를 섬기는 사람이지?" "그건 틀림없지.""자네가 군대를 이끌고 적의 무리를 쳐 부수는 것은 결국 우리 중국 천자를 위하는 일이지?" "그렇지, 그래 그게 어쨌단 이야기인가?""그건 틀림없지." "그렇다면, 계속 들어보게, 자네가 거느린 군대는 중국 천자의 군대인데, 자네가 지금 중국 천자의 허락을 받고 군을 동원하는 것인가? 아니면 중국 천자의 명령이라도 받았단 말인가? 그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네." 주지문이 어안이 벙벙하였다. 사실 그렇다. 자기의 성급한 판단으로, 다만 성삼문의 한을 풀어 주겠다는 일심에서의 행동이었지 그것이 중국 천자의 허락이나 명령은 아니었던 것이다 "자네가 스승의 원한을 갚으려는 것은 십분 이해할 수 있으나, 자네가 모시고 있는 중국천자의 허락없이 천자의 군대를 출동시킨다는 것은 첫째, 중국 천자에 대한 불충이 먼저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자기에게 높은 벼슬을 내려 준 자기 나라 천자에게는 불충을 저지르더라도 자네는 조선 땅의 스승의 원한을 갚으려 드는 것인가? 잘 생각하여 보게." 주지문은 친구의 이 말에 다시 이성을 되찾지 않을 수 없었다. 확실히 친구들의 말은 옳았다. 스승을 위하자니 천자에게 불충을 먼저 저지르게 되는 일이 벌어질 것이 뻔하였다. 주지문은 이윽고 친구들의 손을 잡고 이렇게 말하였다. "옳네. 옳은 말이야. 내가 지나치게 흥분하였던 것 같네. 고맙네.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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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림이란 고장 이름의 유래

의왕시 왕곡동 왕림은 "왕께서 임하시었다"하여 생긴 이름이라고 한다. 조선조 정조대왕이 화산에 모신 부왕의 능에 참배하기 위하여 친히 서울에서부터 직접 행차하였다는 이야기는 정조대왕의 효성과 함께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그런데 그 길목이 서울에서 과천 남태령을 넘어 지금 의왕시 왕곡동을 거쳐 다시 지금의 지지대고개라고 일컫는 고개를 넘어 화산에 이르는 노정이었다 한다. 그 중 이 왕곡동 언저리에 이르면 한참 쉬어가기 위하여 말에서 내렸다 하는데 그것은 쉬기도 할 겸 이 근처에 묻힌 정조가 아직 세자 시절에 친히 글을 가르쳐 준 청풍김씨 김재의 묘를 지나게 되어 경의를 표하기 위해서 였다고 한다. 그래서 그 지점에 하마비가 있었고, 때로는 이 고장에 묵으시기도 하였는데 그 묵으시던 행궁터가 현재 의왕시청이 있는 바로 그 자리였다고 한다. 한편, 세워졌던 하마비는 한국전쟁 전까지 있었는데 그 후에 홍수에 그만 유실되어 지금은 찾을 수가 없다고 한다. 이러저러한 연유로 이 고장 이름을 '왕이 임하신 곳' 즉 '王臨'이라고 하였는데 '' 자를 피하여 같은 음인 ''으로 고치어 지금의 '旺臨'이 되어 그냥 전하게 내려오고 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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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암 안터 전설

의왕시 월암동에 안터마을이 있다. 지금은 옛이야기를 지닌 널따란 밭이 있을 뿐, 인가는 한 채도 없으나 예전엔 상당히 부유한 부자가 살고 있었으므로 그 부잣집에 관계하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이 부잣집에는 거의 날마다 이곳 저곳에서 손님들이 와서 언제나 식객이 혼잡을 이루고 있었다. 부자는 넉넉히 살고 있으므로 그들을 억제할 수도 없는 처지였으나 마음 속으로는 언제나 반가운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짜증이 날 지경이 었다. 그러던 어느 날 금강산에서 내려왔다는 한 스님이 대문 밖에서 염불을 염송하면서 시주를 청하였다. 그렇지 않아도 손님들이 우글거리고 그 치다꺼리에 마음이 늘 불편했던 주인 영감은 이 스님에게 한마디 하였다. "여보시오, 스님. 보시다시피 우리 집에는 이렇게 손님이 가득 오셔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으니, 그냥 가시오." 목탁을 두드리며 염불을 외우던 스님은 눈을 감은 채로 대꾸하였다. "나으리 인덕에 이렇게 손님들이 많이 오시는 것도 부처님의 은덕이 아니오리까? 그러하오니 다소간의 시주를 베푸시는 것이 또한 소승에 대한 보시가 아니겠습니까?" "뭐라구요? 손님들이 모이는 것이 부처님의 은덕이라구요?" "예 그러하옵니다.""그럼 좋소. 내 이번엔 시주를 아주 많이 하겠으니 부처님께 내 소원을 올려 주실 수 있겠소?" "어떠한 소원이신지요?" "다름이 아니라, 내 요 근자에 이르러서는 찾아오는 손님들이 그치지 않아 골치가 아프니, 제발 그 손님들이 오지 않도록 불공을 좀 드려 달라는 소원이요. 되겠소?" "예. 나으리께서 그것이 소원이시라면 하여 드리지요."부잣집 영감은 곧 하인을 시켜 광에서 쌀 한 말을 담아다가 건네주게 하였다. 잘 해야 쌀 한 두되 쯤 생각한 스님은 저으기 마음 속으로 놀래었다. 그러나 내색할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시치미를 떼고 진정으로 고맙다고 인사하였다. "그런데 스님. 또 한가지 청이 있소. 오늘 내가 시주하는 시주로써 이제 우리 집에서는 앞으로 다시 시주가 없을 것인 즉 그리 아시오." 스님은 다시 놀래었다. 자기가 넉넉히 살고 있어 손님들이 웬만큼 모이더라도 살림에는 별 걱정이 없을텐데 그것을 인색한 마음으로 귀찮게 여기면서, 또한 쌀 한 말 시주로써 그 손님들을 못 오게 해달라는 청도 우스우려니와, 이런 큰 부잣집에서 쌀 한 말로 다시는 오지 말라는 것은 다시금 그 주인의 인색함이 얼마나 심한 것인가를 알게 하였다. 스님은 주인에게 이렇게 말하였다."예, 알겠습니다. 소승은 이제 다시는 댁에 들르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손님들이 다시 댁에 모이지 않게 하는 좋은 수가 있습니다." 주인은 반가워하면서 그 수를 물었다. 말씨도 달라졌다. "좋은 수가 있다니, 무슨 수 입니까.""댁에 들어오는 이 소로길을 배로 넓히시고 굽은 길목을 곧바로 잡으십시오." 주인은 그럴듯하게 생각하였다. 쌀을 한 말이나 되도록 시주했는데 설마 스님이 거짓말이야 하겠는가 싶어서였다. 뿐만 아니라 스님의 행동이 보통 스님이 아니라 '대사' 정도는 되리라 여겼다. 스님이 돌아간 뒤 주인은 스님이 일러준 대로 길을 넓히고, 굽은 길목을 바로잡고 큰 법석을 떨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손님이 그치기를 바라던 이 부잣집에는 길을 고치기 전 보다도 손님들이 더 몰리기 시작하였다. 길을 넓히고 곧바로 길을 고친 것은 이 주인이 손님들이 출입하기에 편하게 하여준 것이라고 소문이 나서 매일 모여드는 군중은 흡사 저자 같았다. 그러면서 이 부잣집은 너무 많은 손님 치다꺼리에 살림이 줄기 시작하더니 얼마 안가서 그만 망해버렸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집도 낡아 허물어지고 이 부잣집에 딸려 살던 이웃집들도 하나 둘 다른 곳으로 옮겨 결국은 지금처럼 넓은 밭만이 남게 되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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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암동 거지논, 팥죽배기, 국논배기 이야기

의왕시 월암동 도룡(도림교라고도 현지에서는 이른다)마을에 거지논·팥죽배기·국논배기라 부르는 논들이 있는데, 이들 명칭은 그 땅값이 그렇다는 것을 나타내 주고 있다 한다. 즉 '거지논'이란 옛날에 어느 한 해가 아주 가물어 양식이 떨어졌을 때 그 논 임자에게 죽 한 그릇을 주고 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고, '팥죽배기' 역시 흉년에 팥죽 한 그릇을 주고 산 것이고, '국논'은 또한 어느 해인가 큰 흉년에 국 한 그릇을 논 임자에게 주고 샀다하여 각각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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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조와 지지대

정조께서 세손으로 계실 때의 일이다. 못된 신하들이 영조대왕께 아뢰어 세손이 읽으려는 시전요아편을 금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못 읽게 하는 것을 굳이 읽어 보고 싶어하는 것이 인간 심리인지라 세손은 어느 날 몰래 책을 펼쳐서 읽어보니, 부모를 잃은 자녀에게 눈물을 자아내게 하는 구절이 있었다. 부혜생아(父兮生我=아버지가 나를 낳으시고)모혜국아(母兮鞠我=어머니가 나를 기르셨으니) 욕보심은(欲報深恩=그 깊은 은혜를 갚고자 할진대)호천망극(昊天罔極=하늘을 우러러 통곡을 하여도 다 할 수가 없다.) 세손이 이 대목을 읽는 것을 어느 간인(奸人)이 보고 영조께 아뢰었다. 영조께서는 크게 진노(震怒)하시어 세손을 오라 하시고 한편으로는 내시를 시켜 읽고 있던 책을 가져오게 하였다. 그러나 뜻밖에 시전요아편 책장이 오려져 있지 않은가. 그것은 홍국영(洪國榮)이 마침 동궁(東宮)에 있을 때 세손이 어전에 불려 나가는 것을 이상히 여겨 무슨 일이 있을까 하는 예감이 들어 세손의 방을 가 보니 시전요아편이 펼쳐져 있는지라 그 책장을 장도로 오려냈던 것이다. 영조께서 책장을 오려낸 것이 무슨 까닭인가고 묻자 세손은 그 책을 읽지 말라시는 분부이기에 그리했노라고 엉겁결에 대답을 하여 무사했던 것이다. 그 후 정조께서 왕위에 오르신 후 부친을 모신 화산(華山) 현융원(顯隆園)에 자주 참배를 하시었다. 그러나 임금님의 마음을 알고 있는지라 한편 위안을 해 드리면서 환궁 하실 것을 권하니 왕께서는 "지극한 슬픔이 속에 있으니 어떻게 참을 수가 있느냐" 하시고 땅에 엎드려 일어나지를 못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명일화성 회수원, 지지대상우지지(明日華城回首遠 遲遲臺上又遲遲)" 란 글을 지어 화성을 떠나기가 싫음을 읊었다. 부친에 대한 지극한 효성을 넉넉히 알 수가 있다. 수원을 떠나 환궁하시는 길은 북쪽에 있는 고개를 넘어야 하고 이 고개를 넘으면 한동안은 다시 어버이의 묘소마저 바라 볼 수가 없음을 한탄하시며 얼마쯤 가시다가는 멈추고, 화산을 바라보시고는 또 가시다가 멈추고 하여 행차가 너무나 지지(遲遲)하여 그때부터 그 고개를 지지대라 불러 온 것이라 한다. 그러나 지지라는 뜻이 보통 느리다는 것이 아니고 옛부터 부모를 생각해서 지지하다는 뜻으로 말하는 것이라 한다. 즉 옛날 공자(孔子)가 노()나라 사관(司冠) 벼슬에서 물러나 노나라를 떠날 때 공자의 걸음이 너무 지지함에 제자인 자로(子路)가 어찌 그리 발걸음이 느리냐고 그 까닭을 물어 본 즉 공자가 하는 말이 "노나라는 나의 부모지향(父母之鄕)이니, 더디고 더딘 나의 걸음이어라, 부모의 나라에서 내가 가는 때문이어라(遲遲吾行 去父母國之故也)"한데서 그때부터 이 말이 나왔다고 하는데 더욱이 어버이를 모신 곳을 떠나가는 정조대왕의 발걸음이 가벼울 리가 없고, 공자의 말과 같이 역시 걸음이 더디다는 데서 지지대(遲遲臺)란 이름이 지어졌다고 한다. 그리고 정조께서 지은 지지대 시()의 그 첫 구절에서 보더라도 어버이를 사모하는 마음은 여실히 엿볼 수가 있는 것이다. "이르나 저무나 사모하는 마음을 다하지 못하여 이날에 또 다시 화성에 왔구나(晨昏 不盡慕 此日又華城)"